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가수들에겐 여김없이 모창 가수들이 생기게 되는데요. 예로 조영필, 태쥐나, 패튀김, 밤실이, 너훈아 등이 있으며 이들은 대중음악계에 한 자리를 차지하며 대중과 소통해 왔습니다.

모창 가수에서 벗어나 하나의 브랜드로 자기매김한 인기 모창 가수들, 하지만 평생 ‘짝퉁’이라는 이야기를 듣다가 떠난 인물이 있는데 바로 나훈아의 모창 가수로 유명했던 너훈아, 故 김갑순씨입니다.
그의 동생은 폐암 투병 중, 고충제 복용 이후 호전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난 개그맨 故 김철민씨입니다.
너훈아로 20여년을 살아온 그는 지난 2014년 1월 12일 간암으로 숨을 거뒀는데 그의 나이 57세로 젊은 나이였습니다.

그는 2년간 간암 투병을 하면서도 밤무대와 행사에서 음악에 대한 애정, 무대에 대한 열정을 가수로서 존재감을 드러냈는데 생전 그는 “진짜 나훈아가 오려면 5천만원은 줘야 합니다. 저 너훈아는 그냥 왔습니데이”라는 유쾌한 멘트로 공연의 분위기를 달구기로 유명했는데요.
그런데 많은 이들은 그와 더불어 모창 가수들을 짝퉁이라며 무시했습니다. 세상을 떠난 뒤에야 본명으로 불릴 수 있었던 김갑순씨의 삶을 되돌아보며 고인을 기리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충남 논산에서 소를 키우며 농사일을 돕던 고등학생 김갑수, 일을 할 때면 언제나 노래를 불렀는데 언젠가 화려한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며 박수갈채를 받는 가수가 된 자신의 모습을 언제나 꿈꿨습니다.
그의 어머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어머니는 소 한마리를 팔아 어렵게 돈을 마련해 돈을 쥐어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갑순아, 이 돈 가지고 서울 가서 네 이름으로 노래 내서 꼭 출세해라”
그렇게 야망을 품은 그는 전 재산과 다름없는 소판 돈을 들고 가수가 되기 위해 홀로 서울로 상경했고 밤무대, 허드렛일을 하기 십수년, 1988년 그토록 바랬던 김갑순이라는 이름을 내건 앨범을 세상에 발표합니다.
‘이별한 지 몇 해냐 두고 온 원산만아, 해당화 곱게 피는 내 고향은 명사십리’로 시작하는 노래 <명사십리>는 ‘가요무대’에도 소개됐는데요.

텔레비전 가요 프로그램 무대에도 올라갔으니 이제 성공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겠지만 아쉽게도 거기까지였습니다. 그의 청운에 부푼 꿈은 얼마 가지 못했는데 신곡 이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면서 오랜 무명 생활을 시작합니다.
무명 생활이 길어지면서 그는 노숙인, 일용직 노동자로 전전했는데 하루벌어 하루사는 막노동자, 그도 안되면 노숙으로 버티던 시절을 경험하고 결국 어머니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가수의 길을 포기할 수 없었던 김갑순, 우연한 기회에 ‘나훈아 모창대회’에 나가 금상을 수상하게 됐고 그 계기로 가수 나훈아의 모창과 모방을 시작합니다.
그가 본격적으로 모방가수의 길을 걷게 된것은 1990년대 초반 개그맨 故 김형곤을 만나면서부터인데 그에게 ‘너훈아’라는 예명을 만들어줬고 무명 가수 김갑순은 ‘너훈아’로 다시 태어났고 진로를 바꾼 그에게 열려 있는 무대는 많았습니다.

“내가 ‘내 이름으로 살겠다’고 나섰을 땐 다들 등을 돌리던 이들이 내가 나의 길을 포기하고 저기 저 빛나는 별을 흉내 내자, 열광하기 시작했습니다.”
꿩 대신 닭이라고 나훈아를 부를 여력이 안됐던 밤무대가 그에게 문을 열어줬으며, 밤무대에서 명성을 날리던 그는 1992년 sbs 개국 기념으로 열린 ‘나훈아 모창대회’에서 직접 만나기까지 합니다.

‘나운하’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평생의 동지 박승창과 함께였습니다. 참고로 방송에서 가부장적인 모습을 보이며 40년간 삼시세끼 10첩 반상을 차린 아내를 식당 직원처럼 대해 시청자들에게 분노를 샀던 인물은 ‘너훈아’가 아닌 나운하’였습니다.
같은 모창 가수이면서 외모도 비슷해 종종 두 사람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기도 했는데요. 너훈아로 살았던 지난 25년간 김갑수는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사계절 상관없이 하루 3,4개의 스케줄을 소화하는 이미테이션 가수계의 톱스타였고 밤무대에서도 그를 모셔가려는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그야말로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유명해진것에서 멈추지 않고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나훈아가 되기 위해 원곡 테이프를 듣고 또 들었으며 하루에 노래만 50곡 이상을 불렀습니다.
조금 더 비슷해지기 위해서 얼굴 성형까지 마다하지 않았고 말씨가 입에 베어 있어야 한다며, 한사코 고향이 아닌 경상도 사투리를 쓰던 그였습니다.
생전 한 인터뷰에서 “내가 나훈아씨는 아니지만 무대에 서면 팬들이 대리만족을 느껴요.”라며 너훈아로 사는 인생의 보람을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너훈나로 살았던 지난 25년의 세월이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공연을 본 관객들은 격려와 환호를 보냈지만 비웃음과 야유를 보내는 관객도 있었는데요.
특히 밤무대 공연을 할 때면 술에 취한 손님들이 그에게 가짜라며 무대에서 내려올 것을 강요할 때도 있었습니다. 나훈아의 그림자 인생을 사는 그에게 ‘짝퉁’ ‘가짜’라는 비아냥은 큰 상처였습니다.
밤무대 mc들은 관객을 웃기기 위해 이미테이션 가수들을 놀려댔는데 “너훈아씨 어머니는 물 떠놓고 기도하신다면서요? ‘진짜 나훈아야 후딱 가거라 그래야 우리 너훈아나가 뜬다'”

누군들 남의 흉내를 내는 것으로 평생을 살고 싶었을까요. 밤무대 사회를 보는 친한 동생이 그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계속해서 ‘짝퉁 나훈아’라고 소개하자 10년간 등을 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는 언젠가는 김갑순이라는 이름으로 가수 생활을 할 것이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나훈아도, 무대도 늘 처절한 애증의 대상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찾는 곳이라면 얼굴을 비췄습니다.
“언젠가 제 본명으로 2집을 내서 성공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품고 그는 퀵서비스 오토바이를 불러 타고 다니며 행사를 뛰었고 아들의 중국 유학길에 아내가 동행하면서 홀로 남은 그는 더더욱 쉴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열심히 살던 그에게 또다시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간암 3기 판정을 받은 그는 자신에게 살 날이 길어야 4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청천병력과도 같은 소식을 듣게 되는데요.

그는 자신이 투병 생활을 하는 것이 알려지면 무대에 오르지 못할까봐 병을 숨겼습니다. ‘어차피 얼마 살지 못할 거라면 편한 마음으로 노래하다가 무대 위에서 쓰러지겠다’라고 말하며 끊임없이 공연을 이어갔습니다.
결국 공연 중 쓰러져 그는 병원에 입원했는데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복수로 부른 배와 주렁주렁 꽂힌 파이프를 숨긴 채 세상을 떠나기 20일전쯤 지적 장애인 보호시설을 찾아 무대에 올랐고 그것이 마지막 무대가 됐습니다.
동생 김철민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형은 투병 중에도 마이크를 놓지 않았습니다. 복수에 물이 차서 튜브를 차고 있으면서도 지인들에게 노래를 불러줬는데 그날 눈물 바다가 됐습니다.”라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동생 김철민에게 “난 평생 나훈아 이미테이션 가수 너훈아로 살았다. 넌 나처럼 가짜로 살지 말고 김철민이라는 이름으로 가수에 도전하길 바란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요.
너훈아 김갑순이 떠난 후 많은 이들은 그의 유언대로 가짜로만 산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의 이름이 비록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가수로서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이제는 하늘의 무대에서 김갑순으로 원없이 동생과 노래를 부르며 편히 쉬시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