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겠다’며 약을 먹고 쓰러지자 믿고 결혼했지만 결국.. 죽도록 외로웠다는 이혜숙의 충격 고백

화면 속에 비친 연예인들의 삶은 화려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그들의 삶을 동경하는데요. 하지만 오랫동안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힘겨운 시간을 이겨내온 이들 또한 많습니다.
특히 여자 연예인의 경우에는 결혼으로 은퇴했다가 고된 결혼 생활 후 다시 복귀하는 경우가 꽤 있는데 오늘 소개해드릴 배우 이혜숙 또한 굴곡있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녀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잠시 되돌아 보겠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를 한량으로 기억하고 있는 배우 이혜숙, 그녀의 기억에 따르면 흰 구두, 흰 바지 그리고 밀짚모자를 쓰고 나가는날은 누구를 만나러 가시는날이였다고 하는데요.
그녀 어머니와 함께 나갔던 그날을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네 여관 그때는 여인숙이었어요. 아빠한테 절대 이야기하지 말고 내가 여기 있을 테니 아빠 동태를 살펴보라는 거예요. 내가 초등학교 때예요. 컸으면 아빠에게 뭐라고 했을 거예요.”
“그때 마음이 아픈 거예요.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고 내가 왜 상처를 받아야 하고 왜 엄마가 집을 나오지’ 그러고 집에 갔더니 아버지가 막걸리를 계속 마시더라고요.”
“엄마 어디 갔니라고 찾는데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어요. 엄마는 ‘내가 한번 나가보면 네 아빠가 달라지는게 있겠지’ 하고 나간 건데 이틀 만에 돌아오셨어요.”

당시 그녀의 어머니가 약을 드시고 쓰러졌는데 이혜숙은 이 또한 아버지의 바람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추측했습니다. 어린 그녀는 그 모습을 보고 충격보다는 ‘집에 왜 사람이 많지? 엄마가 왜 토하지’라는 생각을 했다고 회상했는데요.
이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고 병간호를 하는 것은 결국 어머니였습니다.
“어느 날 엄마가 이런 말을 하시더라고요. ‘잠자리를 39살 이후로 한 적이 없다’고 그게 굉장히 충격이었어요. 그런데 살아보니 그렇게 살 수도 있겠더라고요. 왜 그렇게 사셨냐고 물어보면 너희들 때문에 살았지 하셨어요.”
“결국 우리 엄마 세대는 고통받고 상처받으면서 아이들 때문에 살아온 인생 같아요.”

이혜숙은 1981년 사극 ‘여인열전 장희빈’과 1982년 사극 ‘여인열전 은장도’에 출연하면서 큰 인기를 모으는데 특히 인현왕후 역할을 맡았던 드라마 ‘장희빈’으로 신인 배우로서는 드물게 많은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러다가 80년대에 그녀는 파혼 사건을 겪으면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되는데요. 원래 그녀는 조금 이른 나이에 결혼을 선언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이 결혼 발표는 당시 여러 가지 사정으로 결국 파혼으로 이어졌고 이후 일본으로 진출한 뒤 활동하다 재기에 성공하고 이것을 발판으로 다시 국내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큰 주목을 받은 것은 다름 아닌 1991년 영화 ‘은마는 오지 않는다’로 몬트리올 국제영화제의 여우주연상과 청룡영화상의 인기스타상을 받으면서부터 인데요.

이 영화로 한국영화평론가 협회상 여자 연기상과 대통령 문화 표창을 받는 등 전성기 시절의 인기를 다시 누리며 같은 해에 또 다른 영화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를 통하여 남편 한기은과 좋은 인연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두 사람은 미국 로케이션 중에서 연인 사이로 발전하고 1992년 4월 결혼식을 올리는데 결혼 전 집안의 반대가 있었습니다.
“제가 결혼할 당시만 해도 연예인하고 결혼한다고 하면 서로 하는 집안이 많지 않았어요. 절대 안 된다고 반대를 심하게 했어요. 나는 절대 반대하는 집안과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너무 좋지만 헤어졌죠. 그 몇개월 동안 이 사람은 무수히 많은 여자를 만났는데 만나보니까 결국 나한테 다시 와야겠다고 결론을 내린 거예요. 저한테 이별 여행을 가자고 하더라고요. 내가 하도 안 만나주니까 그 명목 하에 만나자고 한 거예요.”

“갔는데 정말 그때 나한테 한말이 목숨을 끊겠다고 했어요. 안 만나주면 삶을 포기하겠다고요. 술을 못하는 사람이 벌컥벌컥 마시고 쓰러지고 약까지 먹어 놀랐어요.”
자신을 위해 희생하겠다고 하는 남자를 믿고 결혼했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결혼하고 보니 나는 그렇게 시댁 어른들하고 사는 삶이 고달프고 힘든 줄 몰랐어요. 이 남자는 자기만 쏙 빠지고 오로지 엄마 편이었어요. 효자인 줄 알았더니 마마보이었죠.”

“이 남자 하나만 보고 갔는데 신혼 때 날 죽도록 외롭게 만들었어요. 그때 정말 속아서 결혼했어요.”
그리고 그녀는 평생을 두 분의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다고 해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들기도 했는데 알고 보니 남편이 어린 시절 시부모님 슬하에서 자랐던 것이었습니다.
“어버이날에 두 집을 가야 했어요. 아들 노릇을 한거죠. 시고모님인데 우리는 어머니라고 불러요. 두 분의 시어머니가 결혼하자마자 생긴거예요.”
이후 이혜숙은 딸을 낳게 되는데요. 남편이 외아들이었기에 딸을 낳았을 당시 남편보다 자신의 어깨가 더 축 쳐졌다고 하는데 딸을 낳아 고된 시집살이가 될 뻔했지만 이를 벗어나게 해준 것은 뜻밖의 사주였습니다.
시어머니가 재미삼아 사주를 보러 갔다가 그녀가 아들을 낳으면 부부가 헤어지거나 남편이 잘못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라고 하는데요.

“10곳이면 7군데가 다 그 이야기를 하니까 시어머니가 아이 낳으란 말을 안 하셨어요. 그래도 둘째를 가지고 싶었는데 둘째가 안 생기더라고요. 딸을 키워보니까 신랑이 너무 좋아하고 저희 아버님 어머니도 너무 좋아하세요.”
또한 이혜숙은 남편의 수상한 행적을 포착하기도 했는데 우연히 영화 제작자인 남편의 문자를 보고 남편이 여성이 나오는 술집을 드나드는 걸 알게 됩니다.
그녀는 슬쩍 지나가는 말로 ‘오빠 오빠하는 여자는 누구야?’라고 물었고 이에 남편은 ‘사업하면서 가는 술집의 손님 관리일 뿐’이라고 말했다고 하는데요.

이에 이혜숙은 “당신이 알아서 하고 나한테 들키지만 말라고 이야기했어요. 남편에 대해 다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에요. 다 알아서 잘 사는 것도 아니고 몰라서 잘 사는 사람도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녀는 연기를 그만두고 가정에만 전념하려고 할 때 시누이와 함께 미용실을 차리기도 했는데요. 시어머니는 매일같이 미용실을 나와 일하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하루는 그녀의 친구가 놀러와 피자를 시켰고 친구가 시어머니에게 피자를 권했지만 안먹는다고 거절했는데 그날 저녁 사단이 일어 납니다.
“시어머니가 ‘어떻게 친구 앞에서 나에게 피자 한 조각을 권하지 않느냐’고 하셨어요. 저는 친구가 권해서 안 권해도 되는 줄 알았어요. 시어머니께 잘못했다고 말하고 왔는데 너무 서러웠어요.”

“다음 날 아침에 전화하셔서 ‘너 왜 나한테 전화도 없고 미용실에 나오지도 않니?’ 이러셔서 저는 거기서 폭발했어요. 정말 너무하시네요. 저도 할 말 있어요.”라고 처음으로 말대꾸를 했다고 하는데요.
결국 이렇게 살다가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결혼 생활에 돌파구를 찾다 다시 연기를 시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시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다시 배우로 복귀하게 되는데요.
과거 주인공을 도맡아 하던 그녀에게 과거와 같은 배역들이 주어지지 않았고 30대 중반이라는 젊은 나이에도 드라마에서 엄마 역할을 맡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들 그런 이해숙을 안타깝게 생각했지만 이해숙의 생각은 달랐는데 연기자로서 생명력을 기르게 하기 위해선 다양한 엄마 역을 함으로써 중견 연기자로의 변신에 성공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당시 그녀의 판단은 정확했고 계속해서 다양한 작품에서 활약을 이어나갔습니다. 결혼 후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지혜롭게 이겨낸 이혜숙에게 언제나 웃을 수 있는 좋은 날만 가득하기를 바라며 그녀의 앞날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