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기가 없는 아이였지만..” 팔순을 앞두고 한평생 성실하게 연기 인생을 걸어 온 박인환의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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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에 청주에서 태어난 박인환,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쑥스러움을 잘 타는 내성적이고 숫기가 없는 성격을 타고났습니다.

어릴 때만 해도 시골에서 과수원이나 농장을 해보고 싶다고 막연히 꿈을 꾸던 그는 고3때 한 신문에서 신문방송학과나 연극영화과가 전망이 좋다는 기사를 보고 친구 5명과 함께 연극영화과에 지원하게 됩니다.

내성적이던 그가 연극영화과에 지원한다고 하자 어머니는 ‘네가 무슨 거길 가냐, 남 흉내를 잘내느냐? 노래를 잘하느냐? 거긴 아무나 가는데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이후 합격자가 발표되었고 결과는 친구들은 다 떨어졌지만 약 16대1의 경쟁률을 뚫고 박인환는 혼자 합격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대학에 입학한 그는 당시 동기로 윤문식과 최주봉을 만나게 되는데요.

연기를 배우려고 대학에 들어갔지만 막상 가보니 대학은 연기를 가르치는 학원이 아니었습니다. 실기를 공부하고 싶었지만 대학에서는 연극사 등의 이론 수업만 가득했고 읽기힘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억지로 읽었어야 했는데요.

결국 기대와는 달랐던 학교수업에 함께 하던 영극영학과 동기들은 2, 3학년이 되자 포기를 하던가 군대를 가는 등의 사유로 학생 수가 반으로 줄게 됩니다.

박인환의 동기인 윤문식은 후에 “동기들 중에 가장 연기 안할것 같은 자신과 최주봉 그리고 박인환 이 세사람이 결국에는 끝까지 연기자로 남았다”고 밝혔는데요.

연극 무대에 서려면 학교 선배들이 함께 작품을 하자고 불러줘야 할 수 있었지만 당시 윤문식은 서산 시골에서 올라와서 고무신을 신고 다녔고 사투리까지 하니까 연극에 캐스팅이 잘 안되었다고 합니다.

그나마 박인환는 윤문식에 비하면 운이 좋아서 선배들한테 불려다니고 두드려 맞으면서 무대에서 연기를 갈고 닦게 되는데요. 대학 재학 도중 군대에 가게 되는데 군 복무 도중 그만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

바로 낳아주고 길러주신 그의 아버지가 그만 위암에 걸리시는 바람에 일찍 돌아가시고 말았던것인데 아버지를 여의고 군에서 제대를 한 그는 아버지를 대신해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해야 하는 상황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경상대를 졸업해서 은행에 취직을 하는 것이 최고였던 시절이라 그 역시도 복학을 하기 전 경영학과에 편입 원서를 내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요.

그러던 어느 날 그가 활동했던 극단에서 연락이 오는데 ‘3개월간 지방 순회 공연을 도는데 같이 하지 않겠냐’는 제안이었습니다. 당시 시간이 있던 그는 돈도 많이 준다고 하길래 윤문식과 함께 전국 순회 공연에 들어가게 됩니다.

공연이라 봤자 대단한 극장에서 하는 공연이 아니라 일종의 마당극 형식으로 시골 국민학교 운동장이나 공설운동장 또는 냇가에서도 북치고 탈쓰고 장구치며 하는 공연이었습니다.

동기 윤문식이 후에 마당놀이 스타가 된 것이 바로 그때가 출발이었던 것인데 그렇게 3개월간의 일정을 마치자 박인환은 목돈을 받게 되었고 경영학과 편입이 아닌 연극영화과로 복학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이후 오랫동안 돈을 만져보지 못하며 가난한 연극쟁이의 살을 살게 되는데요. 같은 과에 잘생기고 재주 많은 친구들이 중간에 많이 포기를 할 만큼 연극 배우는 힘들고 어렵고 고생만 하면서 돈도 못버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는 이후 결혼을 하며 가정도 꾸렸지만 이후에도 가난한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결혼 후에도 약 10년간 고생스럽게 연극을 하다가 80년대쯤부터 tv로 활동 무대를 옮기게 됩니다.

결혼 후 내내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드라마 쪽으로 연결이 되어 tv 탤런트로 데뷔하게 되는데요. 지금은 명품 원로배우가 된 박인환이지만 사실 그는 처음 tv에서 활동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포기하고도 싶었다고 합니다.

그가 원래 하던 연극은 공연을 한번 하게 되면 한달, 두달 연속으로 하기 때문에 익숙해진 상태에서 무대에 올라가지만 tv는 한번 리허설하고 바로 촬영에 들어가든지 또는 어쩔 때는 당일날 아침에 대본 한번 다같이 읽고 바로 들어가기도 해서 상당히 낯선 환경이었는데요.

게다가 리허설 현장에는 스태프들이 세트를 세우느라 망치질 하는 소리에 조명과 카메라가 돌아가는 소리로 요란했고 연극때는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무대에 올랐지만 드라마 현장에는 소품팀 등 현장 스태프들의 거친 말들이 여기저기에서 나왔기 때문에 시장판처럼 정신없는 상황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전에 리허설을 한 번 하고 오후에 본 촬영에 들어가는데 그렇게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그는 대사를 못 외워서 NG를 내는게  아니라 현장에 적응을 못해서 자꾸 NG을 내게 되는데요.

그렇게 살벌한 드라마 현장에서 한동안 적응을 못했던 그는 집에 가서 결국 아내에게 자신은 tv 드라마를 못 할 것 같다고 실토하게 됩니다.

그런 남편의 이야기를 들은 아내는 “다른 탤런트들도 그 과정을 다 거치지 않았겠느냐, 당신은 당신 편한 연극만 하려고 하느냐”고 물었고 그 말을 들은 박인환는 듣고 보니 일리가 있어서 그렇게 한참동안 힘든 과정을 견디며 티비에서 버티게 되는데요.

드라마 속 박인환의 모습을 보면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지만 사실 그는 과묵한 성격을 타고났고 상당히 내성적이라 말 주변도 없어서 사람들 앞에 서는 걸 싫어한다고 합니다.

유명 연예인들은 학교 다닐때 다들 예능 부장이나 응원 단장을 도맡아 했을것 같지만 실제로 배우들 중에는 내성적인 사람도 많고 그런 사람이 반대로 연기파도 많다고 하는데요.

그나마 드라마는 대본이 있으니까 거기에 몰입을 해서 하면 되지만 예능 프로의 경우, 섭외가 와서 ‘재미있게 해달라’고 요청이 오지만 본인이 재미가 없기 때문에 거의 출연을 꺼리다 보니 우리가 그를 예능 프로에서는 거의 볼 수가 없었던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박인환도 한번 큰 도전을 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드라마 ‘나빌레라’에서 발레를 배우는 노인의 역할을 연기하며 팔순을 앞둔 나이에 발레복까지 입으며 열연을 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일흔여섯 나이에 다 굳은 몸으로 무려 6개월이나 발레 강습을 받으며 드라마의 주연으로 맹활약을 했는데요.

사실 나이가 많아지며 대사를 외우는 것도 이제는 힘든 나이가 되었지만 그는 끝없이 대사를 외우고 춤 연습을 하며, 많은 두려움도 있었지만 열심히 반복한 끝에 결국 드라마를 성공리에 마치게 됩니다.

어느덧 노년이 되며 기억력이 떨어졌지만 상대방과 자신의 대사를 마치 시험 공부하듯이 계속 집중해서 반복적으로 읽고 화장실에 가서도 끊임없이 되새기면서 긴 대사를 외운다는데요.

심지어는 녹화 전날과 녹화 날은 긴장도 되고 집중을 해야 해서 아무도 만나지않았기에 사람 관계에서 오해도 많이 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박인환에게 “그거 몇십년을 했는데 대사 몇마디 외우는 게 뭐가 어렵냐”고 하지만 그는 “내일 녹화다. 그러면 산만해질까봐 외출도 안하고 심지어는 전화도 못 받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연습에 연습을 반복해서 몸에 배게 해야 안 놓치고 겨우 따라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박인환, 과연 명배우답게 그는 사실 연기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일이 잘하는 사람일수록 더 많이 연습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평생을 노력한 결과 젊은 시절 가난에서 벗어나며 세 자녀를 잘 키워냈을 뿐만 아니라 평생을 옆에서 고생해준 아내에게는 작은 건물도 선물해 줄 수 있게 되는데요.

하지만 그렇게 성실하게 활동하던 박인환에게 그만 어느 날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 닥치게 됩니다. 바로 70여 년간 그를 지켜주신 사랑하는 어머니가 그만 세상을 떠나게 되신 것인데요.

서울 중앙대병원 장례식장에 빈소를 차린 박인환은 연극 ‘그대를 사랑합니다’에도 출연 중이었지만 어머니를 보낸 슬픔 속에서도 연극 공연은 꿋꿋이 이어가는 프로의 진면목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과거 동료였던 김인문과 김흥기가 별세했을 때도 빈소에 조문했고 또한 배우 하지원의 동생인 배우 전태수가 30대의 나이에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공개 석상에서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워했던 박인환이었기에 어머니의 별세는 충격으로 다가왔을 텐데요.

과거 한 인터뷰에서도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것이 있냐?’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항상 준비하라고 하지만 자신은 그렇게는 못할 것 같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는 “80대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아직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와닿지도 않는다”며 “몸이 한참 때보다 못하고 기억력도 감퇴했지만 대사는 노력하면 외워지고 움직이는 데도 지장이 없다”고 밝혔는데요.

아직도 ‘자신은 배울 것도 많고 할 일도 많다’고 밝히는 그는 ‘연기자가 안 됐다면 뭐가 됐겠느냐?’는 질문에 “연기는 자신의 운명이자 팔자라서 다른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고 밝혔습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 덕분에 우리 시청자들은 그의 드라마를 보며 때론 웃고 때론 눈물을 흘리며 감동을 받기도 했었던 것인데요.

앞으로도 오래도록 우리 곁에서 건강히 활동하기를 바라며 힘든 인생을 살아온 배우 박인환에게 따뜻한 응원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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