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의 날개로 유명한 이승현의 인생을 보면 롤러 코스터가 따로 없습니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큰 성공을 거둔 사람도 또 그 후에 또 그렇게 실패해서 밑바닥까지 떨어진 사람도 별로 없죠.

1976년 ‘고교 얄개’에 출연해 70년대에 최고의 하이틴 스타로 사랑받았던 배우 이승현이 노숙자가 되었던 사연을 밝혔습니다.

또한 최근 ‘특종세상’에 출연해 연기자 생활을 청산했던 이유와 재혼하게 된 사연을 밝혀 많은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었죠. 어쩌다 원조 하이틴 스타였던 그가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요.
아역 연기자로 크게 주목을 받았던 그는 1970년대 영화 ‘얄개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약 100여 편의 영화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았습니다. 처음에 이승현의 부모님은 아들이 연기하는 것이 탐탁치 않았지만 연기에서 굉장한 재능을 보였죠.

특별히 연기를 배우지도 않았는데 천연덕스럽게 하는 모습이 실로 타고난 재능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오늘날에도 아역 배우들이 많은데 당시 이승현의 연기 실력에 비교할 수 있는 배우는 몇몇 없을 것 같네요.
그렇게 아역 배우로 활동하던 이승현은 1977년 ‘고교 얄개’의 주인공이 됩니다.
“당시 고교 얄개 주인공을 뽑기 위해 오디션을 했는데 200명이 모두 탈락했어요. 대신 감독님이 다른 드라마에 출연하는 제 모습을 보고 출연을 제의하셨죠. 출연료로 100만 원을 받았는데 당시 100만 원이면 서울에 집 한채 살 수 있을 금액이었어요.”
“아마 지금 4,50대 이상은 당시 ‘나두수’ 역할을 하던 이승현의 모습을 잘 기억하고 있겠죠. 그렇게 이승현은 연기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만 곧 고난이 닥쳐옵니다.
“배우들이 아역에서 성인으로 넘어갈 때 겪는 변신에 대한 고통은 이 일은 해보지 않은 분들은 모릅니다. 이 과정을 못 견디고 영화계를 은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죠.”

“결국 저 또한 이승현 하면 고교 얄개라는 인식이 바뀌어 성인 역할은커녕 일반 영화에 출연하는 것조차도 힘들었어요. 그래서 캐나다로 떠나는 것을 선택했어요.”
흥행작이었던 고교 얄개는 이승현의 배우 인생 발목을 잡은 셈이었습니다. ‘얄개’ 이미지가 너무 강렬했던 탓이었죠. 이승현은 항상 까불고 교복 입고 선생님 골탕 먹이는 이미지를 지울 수 없었다고 합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어리게 봤고 연기를 더 하고 싶어도 할 기회가 자꾸 없어지고 나도 이제 끝났구나 한물 같구나 싶었다”고 털어놨죠. 이렇게 이승연은 연기적인 면에서 큰 좌절을 겪었고 또 어머니의 권유가 결정적으로 작용합니다.

일찍 여읜 아버지는 교사였고, 어머니는 외자 청장 비서와 경무대 사무직원으로 일했기에 아들이 외교관이 되기를 바랐죠. 결국 이승현은 홀어머니의 소원대로 1986년 캐나다로 유학을 떠납니다. 하이틴 영화 붐이 끝나자 이승현의 인기도 시들해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우리 어머님이 ‘배우로서 단맛도 쓴맛도 다 보고 하지 않았느냐, 외국에 나가서 공부도 좀 하고 내가 아들 하난데 너 이제 장가갈 나이 된 것 같다’고 압박을 하시더라. 그래서 엄마가 저를 캐나다 유학가게 절차를 밟아 캐나다로 떠났던 것이었죠.”
하지만 이승현은 유학 도중 얼마 못 가 지인이 급사하고 고궁에 거주한 어머니의 고깃집 사업이 소값 파동으로 실패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이승현은 모아두었던 재산도 모두 날려버렸고 이때부터 진짜 고생이 시작되었죠.
“햄버거를 굽고 화장실 바닥을 닦고 손이 부르트도록 낚시용 지렁이를 잡았어요. 막노동도 했고 레스토랑에서 접시도 닦았고 호텔에서 청소부로도 일했죠. 내가 남의 나라에서 무슨 짓거리를 하나 싶었어요.”

“후회도 참 많이 했습니다. ‘한국에 있었으면 어려움 없이 연기 활동을 계속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듭니다”
어머니의 사업 실패 후 이승현은 노숙까지 했다고 밝혀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승현은 “처음엔 엄마가 송금해주면 학비와 생활비는 꼬박꼬박 받았었는데 엄마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어려워지니 손을 벌릴 수 없었죠.”
“7년이라는 세월을 거기서 막노동까지 하며 오갈 데도 없이 공원에서 며칠 밤을 지샜어요.”라며 힘들었던 때를 떠올렸습니다.
결국 이승현은 1993년 캐나다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당시 필리핀에서 의료 봉사 활동을 하고 있던 어머니를 따라 필리핀으로 떠나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독실한 크리스천인 아내를 만나 결혼도 하게 되었죠. 그 당시 이승현은 전 부인과 아들을 한명 두게 되었지만 필리핀에서의 목사 생활이 맞지 않았던 이승현은 결국 1998년 귀국해 처가가 있는 대전광역시에 정착하며 ‘얄개 만두’를 열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업은 순탄치 않았고 결국 전 부인과도 이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의 12년 만에 다시 연기를 시작한 이승현은 쉽게 현재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승현은 후배와 함께 영화사를 차리기도 하지만 이것 역시 사기를 당해 크게 실패하고 말고 끝내 이승현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결심을 하게 되었죠.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어 후배와 함께 술을 퍼마시고 한강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죽는 것도 쉽지 않더군요. 저만 보고 사시는 어머니 얼굴이 떠올라 포기했습니다.”
이후 이승현은 이름도 없는 단역을 떠돌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됩니다. 가진 것 없는 자신을 그대로 받아준 고마운 사람이라고 표현했는데요.
이승현은 ‘이혼 이후 아들과 연락이 끊겼다’고 고백했습니다. 생활고가 이어지면서 아내와 이혼하게 되었고 아들과도 연락이 끊겼다고 하죠. 이승현은 최근 자신이 출연한 유튜브 영상에 아들이 댓글을 달았다며 내용을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댓글에는 ‘연락 끊긴 아버지 모습과 목소리를 이렇게 뵈니 반갑네요. 댓글로 안부를 전하니 마음이 쓰라립니다. 어찌 보면 자식 된 도리를 저라도 지켜야 하는데 사연이 많네요. 거두절미하고 아버지의 재혼을 축하합니다. 아버지를 이해 못하고 힘든 부분이 많았지만 많이 좋아졌어요.’라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이에 지금의 아내는 “못 본 기간이 있으니까 서먹서먹하지만 부모와 자식 간에는 만나고 얘기하다 보면 풀리지 않겠냐”라며 아들과 만나 볼 것을 권했습니다.
하지만 이승현은 “아들이 보고 싶지만 만날 생각은 없다”며 “당신이 아들과 나의 관계를 얼마나 안다고 그렇게 얘기하냐,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내가 아들을 대하는 건 달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혼자 아들이 나온 영상을 보며 그리움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는데요.

이런 이승연의 딱한 처지가 알려지자 예전 얄개 영화의 팬이었던 4, 50대들이 주축이 되어서 ‘얄개 이승현 살리기 운동 본부’까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7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 이승현의 이런 몰락이 큰 충격이었죠.
이승현의 인생을 보면 정말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뜻대로 인생을 산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아역일 때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연기를 시작했다가 연기를 그만둘 때도 어머니의 권유를 따라 성인 연기자에 대한 성장통을 피하고 맙니다.

이후에 다시 어머니의 뜻에 따라 자신과 맞지 않는 선교사의 일을 하게 되었죠. 그나마 나중에라도 자신이 진짜 원하는 연기로 다시 돌아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그의 앞날에 행복만 가득하기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