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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변도 못가릴 하반신 마비..’ 셀수없는 히트곡에 불구하고 일년에 한두번오는 남자와 결혼해 하숙집주인 생활했다는 여가수 지금 확인해보세요

애절한 가사와의 반대로 신나는 리듬으로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국민가요 <남행열차>는 노래방에서 흥을 돋구는데 최고의 노래중 하나로 유명합니다.

<남행열차>를 부른 김수희는 다양한 히트곡으로 가요계를 주름잡았고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그런 그녀가 과거 불법 약물에 연루되어 검찰의 조사를 받아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또한 조직 폭력배였던 전 남편 때문에 힘든 시기를 보내기도 했는데요. 안타깝게도 그녀는 큰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 마비로 8개월간 침상에 누워 지내며 대소변까지 혼자 처리를 못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여자 조용필이라고도 불렸던 김수희는 1953년생으로 올해 나이 70세입니다. 그녀는 부산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어릴 적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하여 이후 줄곧 서울에서 자랐는데요.

하지만 아버지를 일찍 여이고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고 이에 어머니가 집안의 가장이 되어 홀로 딸을 키워내야 했는데요.

그런 모습을 본 김수희는 어머니에게 도움이 되는 자식이 되겠다고 맹세하고는 고등학교를 중퇴 후 18살인 1970년 미8군 무대에서 가수로 처음 데뷔하고 다음 해 기타리스트로 데뷔, 이어 작곡가인 동시에 작사가로도 맹활약을 떨칩니다.

그녀는 데뷔 무렵 미8군 부대 여성 밴드인 ‘블랙캣츠’로 활동하며 밤무대 가수로 생계를 꾸려나갔고 그렇게 약 4년간 밤무대 가수와 동시에 작곡가로 지내다가 1976년에 음반을 발표하였으나 극심한 생활고 때문에 여러가지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후 1978년 자신의 데뷔 음반에 수록돼 있던 블루스 곡인 <너무합니다>가 시대적 환경의 영향을 받아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어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되는데 갑자기 자신의 노래가 주목을 받게 되자 그녀는 얼굴 없는 가수가 되었지만 이 노래를 부른 가수를 대중들이 찾기 시작했습니다.

음반 제작자가 또한 그녀를 찾게되고 이 기회로 가수로 활동을 제대로 시작할 무렵에 대한민국이 유명한 명창 박초월에게 남도 창법을 배우는 등 다양한 창법을 연구했는데요.

이후 1982년에 <멍에>를 발표해고 그동안 힘들었던 감정을 이 노래에 털어넣으며 서럽게 꺾어 부르는 창법을 도입해 대중들에게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멍에>가 히트하면서 정상급 가수로 성장하게 된 김수희는 1983년 불법 약물 사건 혐의를 받아 곤욕을 치르기도 했는데 한창 인기몰이를 하던 중 정부의 불법 약물 파동에 연루되어 검찰의 조사를 받게 됩니다.

이후 방송 정지를 당하고 한국연예인협회에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죄로 제명 처분을 당했는데요. 하지만 약 20여 일 동안 검찰과의 진실 공방 끝에 무죄로 판정이 나 기소 유예로 한국연예인협회에서 김수희에 대한 제명 처분을 철회하고 다시 무대에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20일 만에 복귀한 그녀는 글쓰기에도 소질을 보여 처음으로 가요계 현장 소설인 ‘너무합니다’를 집필하여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1984년에는 소설 ‘설’을 집필하여 출간해 베스트셀러 2위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동시에 그해 <잃어버린 정>으로 10대 가수상을 수상하여 본격적인 인기 가수 대열에 들어섰는데 그녀는 주로 자신만의 독특한 창법을 가미한 서정적이고 분위기 있는 노래만 부르다가 1986년에 기존의 노래들과 달리 빠른 템포의 <남행열차>가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여 현재까지도 사랑받고 있습니다.

이후 호소력 있는 목소리와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여자 조용필이라는 닉네임으로 명성을 다진 김수희는 1989년에 일본으로 진출하였지만 실패의 쓴맛을 보기도 했는데 사실 그녀가 일본 진출을 생각한 것은 불법 약물 사건과 전 남편과의 이혼 때문이었습니다.

후에 방송에서 그녀는 “일본에 진출했던 시기에 전 남편과 이혼을 했고 세상에는 얻는 게 있다면 반드시 잃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어머니가 굉장히 보수적이신데 제가 이혼을 하고 나서 3년 동안 집 밖으로 두문불출했고 결국 종교까지 바꾸셨어요.”

“이런 모든 암울한 상황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찾고 싶었죠. 그래서 ‘너무합니다’를 일본 말로 바꿔서 일본 기획사와 계약 후 활동했어요.”라고 밝혔습니다. 그렇게 일본에서 활동하던 김수희는 곧 국내로 다시 복귀하게 되는데요.

방송에서 그녀는 “일본에서 활동을 하던 당시에 연로한 어머니와 어린 딸이 눈에 밟혔어요. 결국 일본 기획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2년 후에 한국으로 되돌아왔죠.”라고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김수희는 1991년에 <애모>를 발표하면서 팝 발라드 음악으로 전향했습니다. 당시 <애모>는 처음 발표될 당시에는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1993년 대중들에게 알려지면서 김건모, 신승훈, 서태지와 아이들을 제치고 가요 대상을 받을 만큼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한편, 그녀는 1976년 전 남편인 이씨와 결혼식을 올렸는데 당시 양가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부족했던 그녀는 가수를 그만두고 하숙집 아줌마, 파출부, 빵 배달 등 잡히는 대로 일을 해야만 했는데요.

그렇게 아이를 낳고 발표한 곡이 <멍에>인데 김수희는 당시 음반 제작자들에게 ‘결혼해서 아기도 있다’고 말했지만 제작자 측에선 ‘처녀라고 속이면 된다’며 활동을 강요했다고 합니다.

이 일로 후일 스캔들이 터지게 되는데 미혼인 줄 알았던 인기 절정의 여가수에게 남편과 아이가 있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어 행복할 줄만 알았던 그녀의 결혼 생활은 길게 가지 못하고 결국 이혼이란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후 방송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김수희는 “가정 생활은 화목하지 못했어요. 그 남자는 바람 같은 사람이었죠. 1년에 한두 번씩 집에 들어오는 정도였어요. 또한 남편의 좋지 않은 주변 환경 때문에 저까지 자주 구설수에 올랐죠.” 라고 밝혔습니다.

이어 불법 약물 사건 당시를 떠올리며 “저의 결백을 주장하고 싶었지만 남편 주변의 조직 폭력배와 같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내 상황에서 저의 발언은 변명으로 들릴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라고 전해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이후 딸과 함께 방송에 출연해 딸에 대해 언급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딸이 21살에 임신과 결혼을 하게 됐어요. 당시 ‘한 생명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죠. 이미 아이를 가져서 ‘니가 선택한 삶의 후회는 하지 말아라’고 말했어요.”라고 전해 놀라움을 자아냈습니다.

이에 그녀의 딸은 “어린 마음에 엄마, 아빠보다 내 가정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무서웠지만 당당하게 결혼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전했죠.”라고 얘기했는데요.

김수희의 딸 이순정은 1999년에 ‘써니’라는 예명으로 가요계에 데뷔해 주영훈이 작곡한 <데미지>로 활동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이후 미국으로 떠나 2016년 트로트 가수로 변신해 <머리카락 꼭꼭>이라는 곡을 발표했습니다.

그렇게 2016년 mbc 가요베스트 신인상을 수상하며 트로트계의 샛별로 얼굴을 알렸는데요. 이후 첫 번째 남편 이씨와 이혼한 김수희는 피디 출신인 김씨와 만나게 됩니다.

두 번째 남편 김씨는 제주 mbc 피디였는데 김수희가 1990년 제주도에 방송 출연을 하기 위해 방문했다가 그를 만나게 되었고 둘은 곧 연인 관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김씨 또한 한번에 이혼의 아픔이 있었기 때문에 쉽게 가까워질 수 있었는데 그렇게 1년 반 정도의 연애를 거쳐 1991년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이후 아들을 얻었으며 그렇게 김수희는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습니다. 또한 김수희는 과거 방송된 kbs <가족의 품격 풀하우스>에 출연해 “2009년 스케줄 때문에 이동하던 중 큰 교통사고가 났어요. 하반신 마비가 올 수 있는 경고까지 받았죠.”라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김수희는 “당시 누군가는 내 대소변을 받아야 했어요. 그때 남편이 간병을 해줬었는데 아무리 남편이어도 치부를 보이기 싫어 그냥 쫄쫄 굶었죠.”라고 그때를 떠올렸는데요.

이어 “일주일 정도 굶으니 탈수 증상이 나타났어요. 의사가 이러다 죽을 수도 있다고 했죠. 그랬더니 남편이 ‘여보 부부란 전생의 악연이 만나는 건데 난 당신에게 진 빚이 많은가 봐, 그냥 편하게 나한테 맡겨’라고 말하더라고요.”

“그렇게 남편이 7개월 동안 24시간 제 대소변과 수발을 맡았죠. 그땐 미안해서 고맙다는 말을 못 했는데 정말 미안했고 감사해요.”라고 마음을 전했습니다.

많은 히트곡을 내며 가수로서 성공한 그녀의 뒷모습엔 남모를 여러 가지 아픔들이 있었는데 앞으로는 좋은 일들만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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