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년대를 풍미한 쎄시봉의 라이벌로 떠올랐던 가수가 있습니다. 가요계에 혜성처럼 등장해 <고별> <망향> <석별> 등으로 이름을 알린 홍민입니다.
그는 데뷔한 지 50년 가까이 된 지금도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며 영원한 오빠로 사랑받고 있지만 최근 안타까운 가정사를 고백하며 이목을 끌었습니다.
1947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난 홍민는 73년 <고별>을 발표하며 가요계에 데뷔했습니다. 그는 데뷔 후 발표한 <망향> <석별> 등의 노래가 연이어 히트하며 80년대를 풍미하는 정상급 가수로 발돋움했습니다.

홍민은 6, 70년대를 주름 잡은 쎄시봉의 맞수로 떠오를 정도로 큰 인기를 구가했는데 동시대에 활동했던 가수 김도향은 그에 대해 이렇게 평했습니다.
“인기가 대단했어요. 오빠 부대의 원조예요. 그런 걸 좀 부끄러워하던 시대인데도 여학생들이 100명씩 쫓아다녔어요. 오빠 부대를 제일 많이 거느렸어요.”

김도향의 칭찬에 홍민은 “아니에요. <고별>로 인기를 끌었을때 쎄시봉의 이장희가 <그건너>를 불러서 저지를 당했어요라며 겸손한 태도를 보였는데 실제로 당시 홍민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홍민의 노래 중 가장 큰 히트를 기록한 것은 데뷔곡으로 알려진 <고별>인데 홍민은 이 곡으로 혜성처럼 가요계에 등장해 무명 시절 없이 탑가수로 등극했습니다.
하지만 홍민의 진짜 데뷔곡은 <망향>으로 이 곡은 잉글버트 험퍼딩크의 노래의 가사를 붙인 번안가요입니다.
“노래를 잘한다는 소문이 나서 한 콘테스트에 나갔고 10주간 1등을 했어요. 그 이후 성악을 하던 사촌 누님이 살던 동네에 이종환이라는 분이 있었어요. 저녁에 초대해서 같이 식사하시겠다더라고요. 그게 오디션이었어요.”

“이후 그분 사무실에 갔더니 LP판 한장과 지어놓은 가사를 주시더라고요. 이 노래의 가사를 대입시켜 연습해오라더라고요. 그게 망향이었어요.”
콘테스트에서 오랫동안 1위를 장악했을 만큼 홍민의 노래 실력은 뛰어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노래 실력은 이종환의 눈에 들어 빛을 볼 수 있었고 결국에는 방송에 대비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무명 시절이 길지도 않은 데다가 당대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쎄시봉을 제치고 가장 많은 오빠 부대를 이끌었으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인생일까요.

가수로서 홍민은 데뷔하자마자 탄탄대로를 달렸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노래에는 대부분 고독과 쓸쓸함 그리움을 담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일각에서는 홍민을 그리움의 가수라고도 부르는데 그 원천에는 부모님을 잃고 특히나 어머니에게는 두 번이나 버림받은 안타까운 배경이 있습니다.
홍민의 아버지는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제국대학교 교수를 지낸 지식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아버지는 가족 곁에서 사라졌습니다.
어느 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아버지 홍민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마냥 납치된 것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내 그리움의 원천은 부모님이에요. 부모를 모르고 살았어요. 아버지가 월북했는데 당시에는 연좌제가 있어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되는 시대였어요. 아버지가 납치된 줄 알았어요. 나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어요.”
홍민의 아버지 홍희유는 일본 유학시절 사회주의 사상을 접했고 1951년 소설가 이문열의 아버지 이원철과 함께 월북을 감행했습니다.
대체 어떤 이유로 처자식까지 버리고 간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홍민의 부친은 북한에서 잘 사는 듯 보였습니다. 그는 북한에 저명한 저서를 냈고 학자로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남한에 남겨진 처자식들은 아버지를 잃은 그리움의 아픈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위에 누나 2살 터울 동생이 있어요.엄마하고 저희 삼남매가 남았는데 4살때도 필름이 끊긴 것처럼 기억이 나요. 어머니는 누나를 데리고 아버지 찾아간다고 나가셨어요. 그렇게 영영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가장 큰 첫딸만 데리고 집을 나갔습니다. 그 때문에 홍민은 동생과 함께 외가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외갓집에 가서 살았어요. 동생은 1년도 채 안돼 하늘나라로 갔어요. 이모는 나더러 엄마라고 부르라는데 죽어도 엄마 소리가 안 나오더라고요. 이모라고 안 부르고 아줌마라고 불렀어요.”
한순간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거기에 홍민은 어린 동생마저 떠나보내며 가족을 잃었습니다. 쓸쓸한 유년 시절을 보냈기에 홍민의 노래에는 유독 그리운 내용이 많이 담긴 것 같습니다.
아주 어릴 적 헤어진 어머니, 홍민은 다시 만날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을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어머니를 만난 적도 있습니다.

한창 활발히 활동하던 70년대 홍민은 자신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인물이 있다는 제보를 받고 아내와 한달음에 달려갔습니다. 그는 부산 국제시장에 있는 어느 아주머니가 자신이 TV에 나오는 장면을 볼 때마다 “저 애가 내 아들인데”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수소문 끝에 그 아주머니를 만났지만 그녀는 자신이 홍민의 어머니가 아니라며 손사래 쳤습니다.
“시장에서 한 상인이 나만 나오면 자기 아들이라고 말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어요. 어머니가 살아있다 해서 수소문했는데 결론은 아니더라고요.”
“그런데 아내는 어머니가 맞는 것 같다며 여자의 느낌이라고 하더라고요. 또 한 번 버림받은 느낌이었어요. 엘리베이터를 타니 내 등을 만지며 아니어도 언제든 오라고 했는데 기분이 묘했어요.”
평생을 그리워한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한달음에 달려간 곳에서 그는 좌절했습니다. 두 번 버림받았다는 생각마저 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그는 더 뼈아픈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 작은 어머니에게 그분 사진을 보여줬더니 내 엄마 맞다고 하시더라고요. 지금도 가슴에 남아 있어요.”
대체 어머니는 왜 자신을 힘들게 찾아온 아들을 또다시 외면한 걸까요. 어릴때 버리고 간 것도 큰 상처였지만 물어물어 찾아갔는데도 등을 돌린 어머니에게 홍민은 말도 못할 배신감과 서운한 감정이 들었을 겁니다.
그리고 가족과 관련된 시련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홍민은 결혼 생활조차 순탄치 않았습니다.

“첫 아이 때문에 결혼 생활이 시작됐어요. 책임감 때문에 결혼했지만 생각과 현실은 달랐어요. 가정이라는 틀 안에서 지킬것은 다 지키며 살았지만 서로가 생각하는 가치관과 생각이 달랐어요.”
두 사람은 성격이 매우 달랐습니다. 홍민은 자유로움을 추구했고 아내는 가족끼리 모든 것을 공유하길 바랐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큰 갈등을 빚었던 것은 경제적인 문제였습니다.
“제가 따로 제 경제생활을 할 수 없었어요. 개인카드도 없고 오로지 제가 필요한 돈은 타서 써야 하니까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아내가 모든 경제권을 관리하기에 그는 자신이 번 돈을 한 푼도 수중에 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그는 자기 힘으로는 세상을 살아갈 수조차 없다는 생각마저 했습니다.
경제적인 것뿐 아니라 그의 주민등록증, 인감도장까지 아내 소유가 된 지 오래였습니다. 어느 날 그녀의 벨트를 메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홍미는 정신병원까지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극단적인 시도를 할 만큼 그는 너무나도 불행했습니다. 결국 그는 집을 나온 후 이혼을 했습니다. 그때 큰아들이 결혼 생활의 증인이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부부는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홍민의 사연을 들은 네티즌들은 “어머니에게 두 번 버림 받은 것도 힘든데 결혼 생활마저 불행했다니 안타깝다.” “힘들게 자유를 되찾은 만큼 행복하셨으면”이라며 그의 아픔에 공감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결혼 생활까지 유달리 힘든 길을 걸어온 그의 인생의 안쓰러운 마음이 듭니다. 많은 시련을 겪으며 달려온 만큼 앞으로는 좋은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