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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 그리고 고독과 싸우며 살았다’ 대한민국을 빛낸 원로 가수, 부모도 잃고 자식도 없이 살더니 결국.. 팔순을 앞두고 들려 온 소식에 안타까움만 쏟아지는이유

과거 인기 가수였던 정미조의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얼마 전, mbn ‘불타는 장미단’에 출연하며 정말 오랜만에 브라운관에 등장했었는대요.

정미조는 당시 후배 손태진과의 무대에서 젊은 시절과 똑같은 녹슬지 않은 가창력을 선보여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었는데요. 하지만 이렇게 화려한 모습 뒤에 정미조는 너무나 처참하고 힘겨운 삶을 살아온 것으로 전해졌는데요.

이른 나이에 부모님 두 분을 모두 잃고 평생을 외로움 속에 살아온 바람에 사람을 사귀는 것조차 서툴렀던 나머지, 학창시절에는 친구가 하나도 없이 쓸쓸히 외톨이로 지내야 했고 가수로 활동하던 중에는 부르던 노래들이 알 수 없이 금지를 당해 결국 갑자기 은퇴했으며,

유일하게 믿었던 여성 매니저에게 수익을 전부 맡겼다가 전 재산을 사기당하는 배신을 당하더니 이후 자유를 찾아 하고 싶었던 미술 공부를 하러 프랑스로 건너갔지만 공부를 마치기까지 13년이나 걸린 바람에 친구도, 가족도 없었던 그곳에서 사무치는 외로움으로 고독과 뼈저리게 싸우며 살았다고 합니다.

더구나 정미조는 결혼도 불혹이 훌쩍 넘어서였던 바람에 아이도 낳지 못했으니 인기 가수의 화려함 뒤에는 사실 사람에 대한 외로움과 그리움으로 평생을 살았던 것인데요.

70년대에 불현듯 나타나 두세 달 만에 혜성처럼 톱스타가 된 정미조가 가수가 된 것은 어느 날의 느닷없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어릴 적 대여섯살 때부터 예술적 인기를 보였는데 김포의 부잣집에서 태어난 정미조는 아버지가 양조장에 극장까지 운영하던 사업가였는대요

휴지 한 장도 함부로 쓰지 않을 정도로 근검절약했으며 김포에서 처음 자동차를 가진 집이었고 일제 tv도 그녀의 집에만 있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우리나라에 tv 채널이 생기기 전이라 afkn만 시청할 수 있었는데,

어느 날 afkn에서 미국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걸 본 정미조는 전혀 새로운 문화를 보고 충격을 받았고 tv를 보던 어른들 뒤에서 그 춤 동작과 노래 부르는 모습을 따라했는데요.

당시 보수적인 시대의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어린 아이가 춤을 춘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정미조는 꺼리낌 없이 흉내를 내고 냈다고 합니다.

정미조에게 내재되어 있던 예능적기는 사실 집안의 내력이었는데 아버지는 트럼펫을 잘 불렀고 어머니는 학창시절 마스 게임을 지휘했을 만큼 활동적이고 춤에 일가견이 있었으며 외가 쪽 집안은 화가와 조각가, 미술학원 원장까지 하고 있었기에

어린 정미조는 이 예능적 dna를 그대로 물려받아 음악적 재능과 춤 그리고 미술적 재능까지 고스란히 몸속에 갖고 태어난 것이었습니다. 정미조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무용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고 중학교 때는 사생대회에 나가 상을 타기도 했는대요.

고등학교 때부터는 아예 사생대회 단골 수상자였을 뿐만 아니라 합창부 활동을 하면서 콩쿨대회에 나가 입상을 하기도 했다는데요. 하지만 이렇게 재능이 뛰어나고 부유하기까지 했던 정미조를 친구들은 질투했던 것일까요.

그녀는 학창시절 내내 친구가 없이 외톨이로 지내야 했는데 모두가 가난했던 60년대 당시 친구들과 친해지기에 정미조는 김포 최고의 갑부집 딸이라 무슨 대화를 해도 공감이 안 되고 수준이 맞지가 않았으며 그러다 보니 친구를 사귀지 못해 학창시절 내내 혼자서 외로이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정미조는 어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비극마저 겪게 되는데 그로 인해 그녀는 후에 밝히길 ‘엄마의 사랑을 못 받고 자라서인지 늘 마음속에 애정 결핍이 많았다’며 ‘그 사건이 자신에겐 아주 큰 슬픔이자 불행이었고 친구도 없었는데 엄마마저 떠나 유년기부터 사무치게 외로워하며 자랐다’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이화여대 서양학과에 진학한 정미조는 입학하자마자 기숙사에 들어갔는데 기숙사 친구들이 서로를 알기 위해 질문과 답을 이어가던 중 한 친구가 정미조에게 뭘 잘하냐고 물었고

무용과 노래를 했다고 대답하니 그럼 노래 한 번 해보라는 대답이 돌아와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게 되는데 이 노래를 들은 기숙사 친구들이 깜짝 놀라며 와 노래 정말 잘한다며 호들갑들 떨자,

그때부터 정미조에게는 노래 잘한다는 소문이 따라다니기 시작하며 결국 신입생 환영회 때 친구들의 추천으로 무대에 나가 팝송까지 부르게 됩니다.

노래가 끝나자 객석에서는 앵콜이 나오고 난리가 나면서 정미조는 순식간에 이대의 명물이 되게 되는데요. 그러던 어느 날, 정미조는 학생처장의 부름을 받게 되는데 학생처장은 그녀에게 너 노래 잘한다며? 라고 물으며 각종 대학 행사에 출연하게 했고 이후 정미조는 축제 때마다 초대 가수로 초청이 되는 등 대학가의 인기 가수로 자리 잡게됩니다.

학교 부활절 행사 때는 음대생을 제치고 그녀가 가스펠송을 불렀으며 대학 2학년 때에는 국군 위문 공연은 물론 이대생 20명으로 조직된 파월 장병 위문 공연단에까지 포함이 되어 공군 특별비행기편을 타고 월남까지 가서 공연을 하게 됩니다.

정미조는 당시를 회상하길 ‘그땐 무대에 만나서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어요. 떨리는 것도 전혀 없었죠. 당시 이대 대강당에서는 좋은 콘서트가 자주 열렸는데 패티김 아워라는 방송 음악 프로그램이 매주 열렸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페티김은 당시 국내 최고의 여가수였죠.

그런데 내가 그때 학생 중에는 유일하게 그 무대에 같이 서서 노래를 불렀어요라며 패티김과 한무대에 서면서 그녀의 노래에 반한 패티김으로부터 자신이 출연하는 tv쇼에 고정 출연하자는 제안도 받는 등 이후 음반을 제작하자는 제의가 쇄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엄격하기로 유명한 학교에서는 그런 활동을 허락할 리가 없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재학 중 연예 활동 등 외부 활동을 제한하는 학칙이 있었기에 정미조회 활동을 허락할지 교수회의까지 열렸고,

또 그녀 자신도 학교 생활을 접어가면서까지 연예 활동을 하고 싶지는 않았으며 이 때문에 레코드 회사에서는 미리 좋은 재목을 잡아두고자 졸업 후 활동을 무료화하겠다는 계약까지 하자고 조르게 되는데요.

정미조는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잘해 늘 장학생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4년 내내 과대표를 맡으며 활발한 대학 생활을 앉으라 미술이 아닌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심각하게 고민을 해봐야 할 사항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미조의 마음속에는 노래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고개를 쳐들고 그녀를 괴롭혔는데 당시 지도 교수는 일단 노래를 하라면서 ‘넌 착실하니 그림을 얼마든지 다시 그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조언했고 결국 그렇게 대학 졸업도 하기 전에 레코드사와 음반 취입 및 가수 활동을 계약하며 졸업 직후인 3월에 첫 앨범을 발표하게 됩니다.

이어 4월에는 후라이보이 곽규석이 진행하는 tbc 쇼쇼쇼에도 출연해 팝송 마이웨이를 부르게 되는데 단 한번의 출연으로 그녀는 레코드 회사와 방송국의 타깃이 되며 여기저기서 우리가 키워주겠다고 달려들었는대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는 가수 중에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드물어서 가수 김상희가 고려대 법대 출신으로 활동을 한 것이 전부였기에 정미조 역시 명문대였던 이대 출신이라는 희귀성에 가창력과 외모까지 대형 가수가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던 것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정미조는 데뷔 2~3개월 만에 전국 가수가 되게 되는데 피아트 자동차를 상품으로 내건 kbs 신인 가요제에서 우승을 한 것은 물론이고 문화방송 노래 경연 프로에서는 10주 연속으로 우승하는 등 승승장구하며 한 달에 28회나 tv 출연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정미조는 가수의 길을 걸으며 생각한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반드시 제대로 시스템이 갖춰진 곳에서 제대로 드레스를 입고 2~3년만 노래를 하겠다는 것이었기에 그녀는 늘 앙드레김이 만든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오르곤 했고 그 인연으로 앙드레김 컬렉션에 특별 출연해 무대에 서기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2~3년이라는 약속은 지키지 못하게 되는데 ‘개여울’이 공전의 히트를 치며 톱스타가 되었고 이후 휘파람을 부세요, 불꽃, 아 사랑아 등이 연이어 히트하며 빽빽한 스케줄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바람에 정신없이 노래를 하다 보니 시간이 어느새 7년 반이나 지나가버리게 됩니다.

이때 가요계에는 연예인들이 무더기로 약초에 연루되는 큰 사건이 벌어졌고 무수히 많은 곡들이 금지곡 처분도 받게 되는데 정미조 역시 휘파람을 부세요는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불꽃인 가사가 불건전하다는 이유로 금지를 당했지만,

누군가가 보고 싶을 때 두 눈을 꼭 감고 마지막이 휘파람을 불러는 가사가 어디가 퇴패적인지 그리고 가슴속에 사랑이 타오르는 불꽃 한 송이가 피었다는 가사가 어디가 불건전하다는 건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처분에 정미조는 환멸을 느끼고 가수 활동에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결국 그녀는 소리는 내고 싶은 만큼 냈기에 새로운 길을 가자고 생각하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며 데뷔 때와 마찬가지로 쇼쇼쇼에서 고별 무대를 가진 뒤 주저없이 가요계를 떠나 파리 유학길에 오르게 되는데요.

사실 정미조는 대학 시절 내내 장학금을 받았을 만큼 미술 공부에도 열심히였고 한 번은 미대에 전체 수석을 할 기회를 놓친 적도 있을 정도였는데 그것 말로 다른 과목은 모두 a를 받았지만 동양화 과목 하나만 B+을 받았던 것이었고,

얼마 전 과거 은사님의 결혼 60주년 기념 행사에 갔다가 그때 B+을 주었던 동양화 교수님을 만나 시험 점수도 좋았고 실기도 잘했는데 왜 그러셨는지 이유를 여쭤보니 맨날 노래나 하고 다니는 날라리 학생인 줄 알고 점수를 짜게 주었다며 실토 아닌 실토를 하셨다고 합니다.

결국 예술가의 삶을 살고자 유학을 떠나게 된 정미조. 하지만 이때 그녀는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게 되는데요. 큰 인기로 많은 돈을 벌었지만 친했던 여성 매니저에게 모든 수익을 일임했다가 서울 반포의 42평짜리 아파트를 매니저가 정미조 모르게 처분을 한것입니다.

정미조의 활동 수익으로 다른 신인 가수를 키우기까지 했으며 그 바람에 정리조에게 남은 돈은 얼마 되지 않아 이후 유학생활 내내 빠듯하게 지내게 됩니다.

정미조는 갑자기 형편이 어려워졌지만 아버지께는 손 벌리지 않았고 그렇다고 돈을 빼돌린 매니저에게도 단 한 푼도 돌려받지 않은 채 유학을 떠나게 되는데요.

학창시절 친구도 없었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신 뒤 가수가 되어 유일하게 매니저를 가족처럼 믿었건만 믿었던 사람이 배신을 하며 정미조는 다시 혼자가 되어 외롭고 고독한 삶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파리에 도착한 정미조는 처음에는 3~5년 예정으로 떠났다가 무려 13년을 지내며 박사까지 마치게 되는데 ’13년의 세월에서 극심한 우울이 떠나지 않았다’며 ‘유학 시절은 한마디로 고독과의 싸움이었어요. 가수일 때는 운전기사에 일해주는 아주머니까지 있었지만,

그땐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만 했죠. 매일 저녁마다 3층 밥을 짓기 일쑤였고 난생 처음 담가보는 김치도 맛있을 리가 없었지요. 친구도 없었으니 더 외로웠죠’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프랑스 파리의 낡은 건물 8층 다락방에서 매일 멀리 에펠탑을 바라보며 힘겹게 고독과 싸웠고 화려한 생활을 하다 덜렁 혼자 외국으로 떨어져 나오니 눈물 한 방울이 무릎 위로 떨어지며 외로움으로 뼈가 시를 정도였으며,

한인들과 어울려 볼까도 생각해 딱 한번 한인 모임에 나가도 사람들이 노래를 하라고 주문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노래를 했지만 파리까지 노래를 하러 온 것도 아니고 더욱이 아무런 장치도 갖춰지지 않은 장소에서 노래를 한다는 것은 아마추어의 행동이라는 생각에 앞으로 가수 생활을 한 정리조에게는 용납이 되지 않았는대요.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라며 종용하는 사람들과 계속 만날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이후 다시는 한인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프랑스 유학 도중에 정미조는 부친상까지 당하게 되는데 상황을 설명하길 ‘유학 생활 중 아버지께서 암에 걸리셔서 돌아가셨다. 여름방학이라 한국에 돌아왔는데 편찮으시다더라. 운명을 다 하실 때까지 곁에 있었다. 부모님은 언젠가 돌아가시는 분이 아니라 항상 내 곁에 계시는 분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힘들었다’며,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까지 이른 나이에 잃는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고 털어놨습니다. 국내 가요계 활동에 지쳐 하고 싶은 미술 공부를 하러 타지까지 갔건만 거기서도 외로움과 싸워야 했고 어머니의 별세 이후 그나마 한 분 계셨던 아버지마저 떠나가셨으니

정미조는 타고난 운명 자체가 혼자 고독하게 비참한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 운명이었던 것이을까요. 부모님 두 분이 모두 돌아가셨으니 이후 방학이 되어 국내에 갔다 온다 한들 반겨주는 부모도 없게 된 정미조는 그런 와중에서도 고통을 견디고 미술 공부에 매진해 유학 시절 평단으로부터 좋은 평도 받게됩니다.

르 살롱전 1등과 몽테카르로 국제그랑프리 예술전 장려상 등 수상도 여러 차례 하다 보니 결국 박사 코스까지 받게 되며 5년이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유학이 7년 3개월이 추가돼 결국 13년이나 프랑스에서 공부하며 외로움과 처절하게 싸우게 됩니다.

박사를 마치고 그제서야 춥고 어두웠던 힘든 생활을 끝내고 국내로 돌아온 정미조는 ‘긴 터널을 뚫고 나온 기분’이라고 말하며 40이 훌쩍 넘은 나이에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원용길 씨와 결혼까지 하게 되는데요.

이미 아이는 낳을 수가 없는 나이였기에 정미조는 아이를 낳겠다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으며 그렇게 그녀는 자식도 없이 그야말로 평생을 사람이 없는 고독하고 외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한번은 집 주차장에서 주차를 돕는 아저씨가 ‘아니, 요즘은 왜 tv에 안 나와요’라고 묻는 걸 듣게 되는데 ‘정미조 씨 아니세요?’라고 묻는 것도 아니고 다짜고짜 ‘왜 안 나오냐 보고 싶은데’라는 말을 듣고 정미조는 이후 팬들의 마음도 아울러야겠다는 생각에 몇십 년 만에 새 앨범도 내고 방송 활동도 조금씩 재개하게 되는데요.

정미조는 오랜만에 tv에 나와 노래를 불렀지만 전성기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목소리와 가창력으로 시청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는데 그간 그림만 그리느라 목을 사용하지 않았다 보니 상태가 아직도 쌩쌩하고 달지 않아 그렇다며 과거보다 노래가 더 잘 나온다고도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변함이 없는 목소리와 다르게 정미조의 눈은 최근 조금 불편해진 상태라고 합니다. 현재 개여울등 그녀의 노래는 젊은이들로부터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가수 아이유 등 많은 후배들이 리메이크를 할 정도로 명곡으로 추앙받고 있으니 과연 명곡은 시대가 지나고 세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받는다는 것을 정미조 스스로가 증명을 하기도 했는데요.

모쪼록 어느덧 70대 중반을 넘어 팔순을 향해 가고 있는 그녀가 앞으로도 다양한 무대에서 대중들에게 좋은 노래를 들려주기를 바라며 힘든 인생을 살아온 정미조에게 여러분의 따뜻한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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